위공자열전 (魏公子列傳) 원문과 번역
사기(史記) 권칠십칠(卷七十七) 열전제십칠(列傳第十七)
🏛️ 제1부: 마스터 가이드 & 핵심 통찰
섹션 제목: “🏛️ 제1부: 마스터 가이드 & 핵심 통찰”💡 본질: 전국시대 사군자(맹상군·평원군·신릉군·춘신군)는 모두 수천 명의 식객을 거느렸지만, 사마천이 유일하게 “진정한 어짊과 낮춤(仁而下士)“을 실천한 현자로 인정한 인물은 신릉군(信陵君, 위무기)뿐이었다. 그는 왕자의 신분이었지만 문지기(후영), 푸줏간 도살자(주해), 도박꾼(모공), 식초 장수(설공) 같은 가장 낮은 자리의 비주류 인재들을 진심으로 공경했다. 그 결과 자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이 비주류 인재들이 목숨을 바쳐 조나라를 구하는 ‘절부구조(窃符救赵)‘의 기적을 일궈냈다. 낮춤의 진정성이 가장 강력한 전략적 자산임을 보여주는 불멸의 고전이다.
1. 신릉군과 핵심 조력자 네트워크
섹션 제목: “1. 신릉군과 핵심 조력자 네트워크”| 인물 | 본래 신분 | 신릉군과의 관계 / 역할 | 결정적 순간의 행동 |
|---|---|---|---|
| 신릉군 (위무기) | 위나라 왕자 | 공자(公子)이자 총사령관 | 직접 수레를 몰고 문지기를 영접하는 등 극단적 겸양 실천 |
| 후영 (侯嬴) | 70세 이문(夷門) 문지기 | 신릉군의 수석 책사 | 병부를 훔쳐 조나라를 구할 대계(절부구조)를 기획하고 북향 자결 |
| 주해 (硃亥) | 시장의 푸줏간 도살자 | 비밀 결사/돌격대장 | 40근 쇠절구로 진비 장군을 쳐 죽여 군권을 신릉군에게 넘김 |
| 모공·설공 (毛公·薛公) | 도박꾼 / 식초 장수 | 은둔 고수 | 신릉군이 조나라에 안주할 때 직언하여 위나라로 귀국시켜 5국 연합 결성 |
| 여희 (如姬) | 위안희왕의 총비 | 부친 원수 갚음의 보은 | 신릉군을 위해 왕의 침실에서 호부(兵符)를 훔쳐냄 |
2. 신릉군의 3대 핵심 멘탈 모델
섹션 제목: “2. 신릉군의 3대 핵심 멘탈 모델”① 인이하사(仁而下士) — 비주류 인재를 품는 낮춤의 리더십
섹션 제목: “① 인이하사(仁而下士) — 비주류 인재를 품는 낮춤의 리더십”- 70세 문지기 후영을 모시기 위해 대량(수도)의 모든 귀족이 보는 앞에서 직접 수레의 왼쪽(상석)을 비우고 말고삐를 잡음.
- 후영이 일부러 푸줏간 친구 주해를 만나 수다를 떨며 모욕을 줘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고 공손히 기다림.
- 교훈: 인재의 마음을 얻는 것은 화려한 대우나 금전이 아니라, 자존심을 완전히 내려놓고 인격을 인정해주는 진정성이다.
② 절부구조(窃符救赵) — 형식적 충성을 넘어선 대의(大義)의 결단
섹션 제목: “② 절부구조(窃符救赵) — 형식적 충성을 넘어선 대의(大義)의 결단”- 진나라의 침략으로 조나라(누이의 나라)가 멸망 직전에 몰리자, 형인 위왕이 보신주의로 군사를 묶어둠.
- 신릉군은 왕의 병부를 훔치고 장군을 처단하여 8만 정예군으로 조나라를 구출, 천하의 합종을 성사시킴.
- 교훈: 때로는 제도적 절차와 개인적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문명적 대의를 위해 결단하는 도덕적 용기가 필요하다.
③ 교만(驕慢)의 경계 — “내가 베푼 것은 잊어라”
섹션 제목: “③ 교만(驕慢)의 경계 — “내가 베푼 것은 잊어라””- 조나라를 구한 후 개선하자 객이 경고함: “남이 나에게 베푼 은혜는 잊지 말아야 하지만, 내가 남에게 베푼 은혜는 반드시 잊어야 합니다.”
- 신릉군은 즉시 스스로를 낮추어 조왕의 극진한 칭송 앞에서도 겸손을 잃지 않음.
- 교훈: 성공의 순간에 스스로 공을 내세우는 순간 은혜는 원망으로 변하고 존경은 사라진다.
📜 제2부: 원문 상세 대역 (Full Reference)
섹션 제목: “📜 제2부: 원문 상세 대역 (Full Reference)”제1절: 신릉군의 인품 — “仁而下士(인이하사)”
섹션 제목: “제1절: 신릉군의 인품 — “仁而下士(인이하사)””절별 번역 및 해설
섹션 제목: “절별 번역 및 해설”① 출신과 품성
원문: 魏公子无忌者,魏昭王子少子而魏安釐王异母弟也。昭王薨,安釐王即位,封公子为信陵君。是时范睢亡魏相秦,以怨魏齐故,秦兵围大梁,破魏华阳下军,走芒卯。魏王及公子患之。 公子为人仁而下士,士无贤不肖皆谦而礼交之,不敢以其富贵骄士。士以此方数千里争往归之,致食客三千人。当是时,诸侯以公子贤,多客,不敢加兵谋魏十馀年。 번역: 위나라 공자 무기는 위소왕의 작은 아들이자 위안희왕의 이복 동생이다. 소왕이 죽고 안희왕이 즉위하여 공자를 신릉군에 봉했다. 이때 범수(范睢)가 위를 떠나 진의 재상이 되어, 위제(魏齐)에 대한 원한 때문에 진군이 대량(大梁)을 포위하고 위의 화양 아래 군대를 격파하고 모맹(芒卯)을 달아나게 했다. 위왕과 공자가 이를 근심했다. 공자는 성품이 어질고 선비에게 몸을 낮추었다(仁而下士). 선비라면 어질든 그렇지 않든 모두 겸허히 예로써 사귀었고, 자신의 부귀로 선비에게 교만하지 않았다. 이에 수천 리 밖에서 선비들이 다투어 그에게로 와서 식객이 3천 명에 이르렀다. 이때 제후들은 공자가 현명하고 식객이 많음을 알고, 10여 년간 감히 위에 군사를 일으키지 못했다.
신릉군의 첫인상은 ‘仁而下士’ — 어질고 몸을 낮춘다 — 이 한마디에 집약된다. 사마천은 ‘사군자’ 중 유일하게 신릉군에게만 이런 표현을 썼다. 평원군·맹상군·춘신군은 ‘많은 식객’으로 유명했지만, 신릉군의 하사(下士)는 진정한 겸손이었다. 범수 건은 배경 설명 — 신릉군의 활약이 필요한 시대적 맥락을 잡아준다.
② 조왕 사냥 episode — 지식이 권력을 위협하다
원문: 公子与魏王博,而北境传举烽,言”赵寇至,且入界”。魏王释博,欲召大臣谋。公子止王曰:“赵王田猎耳,非为寇也。“复博如故。王恐,心不在博。居顷,复从北方来传言曰:“赵王猎耳,非为寇也。“魏王大惊,曰:“公子何以知之?“公子曰:“臣之客有能深得赵王阴事者,赵王所为,客辄以报臣,臣以此知之。“是後魏王畏公子之贤能,不敢任公子以国政。 번역: 공자가 위왕과 바둑을 두고 있었는데, 북쪽 변경에서 봉화가 올라와 “조나라 도적이 쳐들어와 국경에 이르렀다”고 말했다. 위왕이 바둑을 그만두고 대신들을 불러 의논하려 했다. 공자가 왕을 말리며 말했다: “조왕이 사냥하는 것일 뿐, 적이 온 것이 아닙니다.” 다시 바둑을 두었다. 왕은 두려워 마음이 바둑에 있지 않았다. 잠시 후 북쪽에서 다시 전언이 왔다: “조왕이 사냥한 것일 뿐, 적이 아닙니다.” 위왕이 크게 놀라며 말했다: “공자는 어떻게 그것을 알았소?” 공자가 말했다: “신의 식객 중에 조왕의 은밀한 일을 깊이 알 수 있는 자가 있어, 조왕이 하는 일마다 곧 신에게 알려주기에 신이 이렇게 아는 것입니다.” 이 이후로 위왕은 공자의 현명함을 두려워하여 감히 공자에게 국정을 맡기지 못했다.
이 일화는 신릉군의 정보 네트워크의 위력을 보여줌과 동시에, 뛰어난 능력이 오히려 독이 되는 순간을 포착한다. 위안희왕은 동생의 능력에 감탄하기보다 두려움을 느꼈다. 이는 뒤의 반간계 성공의 복선이다 — 왕의 두려움은 이미 싹트고 있었다.
제2절: 후영(侯嬴) — 성문지기에서 최고의 책사로
섹션 제목: “제2절: 후영(侯嬴) — 성문지기에서 최고의 책사로”③ 동문수(东门守)의 시험
원문: 魏有隐士曰侯嬴,年七十,家贫,为大梁夷门监者。公子闻之,往请,欲厚遗之。不肯受,曰:“臣脩身絜行数十年,终不以监门困故而受公子财。“公子於是乃置酒大会宾客。坐定,公子从车骑,虚左,自迎夷门侯生。侯生摄敝衣冠,直上载公子上坐,不让,欲以观公子。公子执辔愈恭。侯生又谓公子曰:“臣有客在市屠中,原枉车骑过之。“公子引车入巿,侯生下见其客硃亥,俾倪故久立,与其客语,微察公子。公子颜色愈和。当是时,魏将相宗室宾客满堂,待公子举酒。巿人皆观公子执辔。从骑皆窃骂侯生。侯生视公子色终不变,乃谢客就车。至家,公子引侯生坐上坐,遍赞宾客,宾客皆惊。酒酣,公子起,为寿侯生前。侯生因谓公子曰:“今日嬴之为公子亦足矣。嬴乃夷门抱关者也,而公子亲枉车骑,自迎嬴於众人广坐之中,不宜有所过,今公子故过之。然嬴欲就公子之名,故久立公子车骑巿中,过客以观公子,公子愈恭。巿人皆以嬴为小人,而以公子为长者能下士也。“於是罢酒,侯生遂为上客。 번역: 위나라에 은사(隐士) 후영(侯嬴)이 있었다. 나이 70세, 집이 가난해 대량의 이문(夷门) 문지기였다. 공자가 이 소식을 듣고 찾아가 후한 선물을 주려 했다. 후영이 받지 않으며 말했다: “신은 몸을 닦고 행실을 곧게 한 지 수십 년, 마침내 문지기로서 곤궁하다는 이유로 공자의 재물을 받지 않겠습니다.” 공자가 이에 큰 연회를 열고 빈객들을 모았다. 자리가 정해지자 공자는 수레와 말을 타고 왼쪽 자리(좌석 중 윗자리)를 비우고 직접 이문으로 후생을 맞으러 갔다. 후생이 해진 옷차림을 하고 곧바로 공자의 수레에 올라 윗자리에 앉으며 사양하지 않았다. 공자의 태도를 시험하려는 것이었다. 공자는 고삐를 잡고 더욱 공손히 모셨다. 후생이 또 공자에게 말했다: “신이 아는 사람이 시장 푸줏간에 있으니, 원하건대 수레를 돌려 들러주십시오.” 공자가 수레를 몰아 시장으로 들어갔다. 후생이 내려 그 식객 주해(硃亥)를 만나 빤히 보며 일부러 오래 서서 그 객과 이야기하며, 은밀히 공자의 표정을 살폈다. 공자의 얼굴빛은 더욱 온화해졌다. 이때 위나라의 장수·재상·종실·빈객들이 연회장에 가득 차 공자의 술잔 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시장 사람들은 모두 공자가 고삐를 잡은 것을 구경했다. 수행 기사들은 모두 은근히 후생을 욕했다. 후생은 공자의 안색이 끝내 변하지 않음을 보고 객에게 작별하고 수레에 올랐다. 집에 도착하자 공자가 후생을 윗자리로 인도하고 모든 빈객들에게 소개하니 빈객들이 모두 놀랐다. 술기운이 돌자 공자가 일어나 후생 앞에서 축수(祝壽)했다. 후생이 이에 공자에게 말했다: “오늘이 후영이 공자를 위해 한 것으로 충분합니다. 후영은 이문을 지키는 문지기일 뿐인데, 공자가 직접 수레를 낮추어 많은 사람들 앞에서 맞으러 오셨습니다. 원래는 지나칠 것이 없는데 공자가 일부러 지나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후영은 공자의 명성을 높이려고, 일부러 공자의 수레를 시장에 오래 세워 두고 객을 만나 공자를 살폈는데 공자는 더욱 공손했습니다. 시장 사람들은 모두 후영을 소인으로 여기고 공자를 ‘어른으로서 선비에게 몸을 낮출 줄 아는 분’이라고 여겼습니다.” 이에 연회를 끝내고 후생은 상객(上客)이 되었다.
이 장면은 사기에서 가장 유명한 장면 중 하나다. 후영은 일부러 무례하게 행동하며 공자의 진심을 시험했다. 핵심은 두 가지:
- 공자의 진정성: 귀족이 문지기에게 고삐를 잡아주고, 시장 사람들 앞에서 망신을 당하면서도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 후영의 궁극적 목적: 공자를 망신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공자의 명성을 높이기 위한 연극이었다 — “시장 사람들은 후영을 소인이라 하고 공자를 어른이라 할 것이다.”
“欲就公子之名” — 이 말이 이 장면의 전부다. 후영은 자신을 낮춤으로써 공자를 높였다.
④ 주해(硃亥) — 푸줏간의 협사
원문: 侯生谓公子曰:“臣所过屠者硃亥,此子贤者,世莫能知,故隐屠间耳。“公子往数请之,硃亥故不复谢,公子怪之。 번역: 후생이 공자에게 말했다: “신이 지나가면서 만난 푸줏간 주인 주해, 이 사람은 현자입니다. 세상이 그를 알아주지 못해 푸줏간에 숨어 있는 것입니다.” 공자가 여러 번 찾아가 청했으나 주해는 일부러 답례하지 않았다. 공자가 이상히 여겼다.
주해는 고전적 협사(俠士)의 전형 — 무슨 일이 터지기 전까지는 모르는 척 숨어 있다가, 결정적 순간에 나서서 목숨을 바친다. 그의 일부러 답례하지 않은 태도는 후영의 무례함과 같은 맥락: 진심의 시험이다.
제3절: 절부구조(窃符救赵) — 가장 극적인 구원작전
섹션 제목: “제3절: 절부구조(窃符救赵) — 가장 극적인 구원작전”⑤ 한단 포위 — 신릉군의 딜레마
원문: 魏安釐王二十年,秦昭王已破赵长平军,又进兵围邯郸。公子姊为赵惠文王弟平原君夫人,数遗魏王及公子书,请救於魏。魏王使将军晋鄙将十万众救赵。秦王使使者告魏王曰:“吾攻赵旦暮且下,而诸侯敢救者,已拔赵,必移兵先击之。“魏王恐,使人止晋鄙,留军壁鄴,名为救赵,实持两端以观望。平原君使者冠盖相属於魏,让魏公子曰:“胜所以自附为婚姻者,以公子之高义,为能急人之困。今邯郸旦暮降秦而魏救不至,安在公子能急人之困也!且公子纵轻胜,弃之降秦,独不怜公子姊邪?“公子患之,数请魏王,及宾客辩士说王万端。魏王畏秦,终不听公子。公子自度终不能得之於王,计不独生而令赵亡,乃请宾客,约车骑百馀乘,欲以客往赴秦军,与赵俱死。 번역: 위안희왕 20년, 진소양왕이 이미 장평의 조군을 격파하고 다시 군사를 내어 한단(邯郸)을 포위했다. 공자의 누이는 조혜문왕의 동생 평원군(平原君)의 부인이었는데, 여러 차례 위왕과 공자에게 편지를 보내 위의 구원을 청했다. 위왕이 장군 진비(晋鄙)에게 10만 병력을 주어 조를 구원하게 했다. 진왕이 사자를 보내 위왕에게 말했다: “내가 조를 공격해 아침저녁으로 함락시키려 한다. 제후들 중에 감히 구원하는 자가 있으면, 조를 함락시킨 후 반드시 군대를 돌려 먼저 그를 치겠다.” 위왕이 두려워하여 사람을 보내 진비를 멈추게 하고 군대를 업(鄴)에 주둔시켰다. 이름은 조를 구원하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양쪽을 지켜보며 관망했다. 평원군의 사자가 끊이지 않고 위에 이르러 위공자를 나무랐다: “내(승, 趙勝)가 공자와 혼인을 맺은 것은 공자의 높은 의로움 때문이다. 공자가 남의 곤란을 급히 여길 줄 알았기 때문이다. 지금 한단이 아침저녁으로 진에 항복하려 하는데 위의 구원이 이르지 않는다. 공자가 남의 곤란을 급히 여긴다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또 공자가 나를 가볍게 여겨 진에 항복하도록 버려둔다 해도, 어찌 공자의 누이는 불쌍히 여기지 않는가?” 공자가 이를 걱정하며 여러 차례 위왕에게 청하고 빈객 변사들로 온갖 방법으로 설득하게 했다. 위왕이 진을 두려워하여 끝내 공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공자는 마침내 왕에게서 허락을 얻을 수 없다고 판단하고, 혼자 살아서 조가 망하도록 둘 수 없다 생각하여 빈객들에게 청해 수레 백여 승을 모으고 식객들과 함께 진군으로 달려가 조와 함께 죽고자 했다.
장면의 드라마는 절정을 향해 간다: 위왕의 이중적 태도, 평원군의 책망(특히 “独不怜公子姊邪” — 어찌 누님은 불쌍히 여기지 않소), 그리고 신릉군의 절망적 결심 — “객(客)과 함께 진군에 돌진해 죽겠다.” 이 자살적 결심이 바로 후영의 개입을 가능케 하는 트리거다.
⑥ 후영의 계책 — 호부 탈취와 진비 살해
원문: 行过夷门,见侯生,具告所以欲死秦军状。辞决而行,侯生曰:“公子勉之矣,老臣不能从。“公子行数里,心不快,曰:“吾所以待侯生者备矣,天下莫不闻,今吾且死而侯生曾无一言半辞送我,我岂有所失哉?“复引车还,问侯生。侯生笑曰:“臣固知公子之还也。“曰:“公子喜士,名闻天下。今有难,无他端而欲赴秦军,譬若以肉投馁虎,何功之有哉?尚安事客?然公子遇臣厚,公子往而臣不送,以是知公子恨之复返也。“公子再拜,因问。侯生乃屏人间语,曰:“嬴闻晋鄙之兵符常在王卧内,而如姬最幸,出入王卧内,力能窃之。嬴闻如姬父为人所杀,如姬资之三年,自王以下欲求报其父仇,莫能得。如姬为公子泣,公子使客斩其仇头,敬进如姬。如姬之欲为公子死,无所辞,顾未有路耳。公子诚一开口请如姬,如姬必许诺,则得虎符夺晋鄙军,北救赵而西卻秦,此五霸之伐也。“公子从其计,请如姬。如姬果盗晋鄙兵符与公子。 번역: 이문을 지나 후생을 만나 진군과 함께 죽으려는 뜻을 모두 알렸다. 작별하고 떠나려 하자 후생이 말했다: “공자께서 힘쓰십시오. 늙은 신은 따를 수 없습니다.” 공자가 몇 리를 가다 마음이 편치 않아 말했다: “내가 후생을 대접한 것이 극진하여 천하에 모르는 이가 없는데, 지금 내가 죽으려 하는데 후생이 한마디 말도 없이 나를 보내다니, 내가 무슨 잘못이 있는 것인가?” 다시 수레를 돌려 후생에게 물었다. 후생이 웃으며 말했다: “신은 진즉 공자께서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 공자는 선비를 좋아하기로 천하에 이름났습니다. 지금 어려움을 당해 다른 방법이 없이 진군으로 달려가려 하는 것은, 마치 고기를 굶주린 호랑이에게 던지는 것과 같아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식객을 기르겠습니까? 그러나 공자께서 신을 후하게 대접했는데, 공자가 가시는데 신이 전송하지 않았기에, 공자가 한스러워 돌아올 줄 알았습니다.” 공자가 두 번 절하고 물었다. 후생이 사람을 물리고 조용히 말했다: “후영이 듣기로 진비의 병부(兵符)는 항상 왕의 침실에 있고, 여희(如姬)가 가장 총애를 받아 왕의 침실을 드나들 수 있으니, 그 힘으로 훔칠 수 있습니다. 후영이 듣기로 여희의 아버지가 사람에게 살해되었는데, 여희가 3년 동안 원수를 갚으려 했으나 왕 이하 아무도 할 수 없었습니다. 여희가 공자에게 울며 하소연하자, 공자가 식객을 보내 그 원수의 목을 베어 여희에게 드렸습니다. 여희는 공자를 위해 죽고 싶어도 마다하지 않는데, 다만 길이 없었을 뿐입니다. 공자가 진실로 한마디만 하면 여희가 반드시 승낙할 것입니다. 그리하면 호부(虎符)를 얻어 진비의 군대를 빼앗고 북으로 조를 구원하며 서쪽으로 진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오패(五霸)의 공업입니다.” 공자가 그 계책을 따라 여희에게 청했다. 여희가 과연 진비의 병부를 훔쳐 공자에게 주었다.
이 장면은 사기 전체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이다. 그냥 계획을 설명하는 게 아니라, 하나의 심리극(psychological drama)이 펼쳐진다.
① 먼저, 공자는 완전히 막다른 골목에 몰려 있다. 위왕이 진을 두려워해 구원군을 보내주지 않으니, 공자로서는 조의 구원 요청(누이의 간청, 평원군의 책망)을 외면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왕을 설득할 수도 없다. 선택지가 없다. 그래서 내린 결론이 자살 돌격 — 식객 수백 명을 데리고 진군 진영으로 달려들어 ‘죽음으로써 의리를 지키겠다’는 것이다. 비장하지만, 냉정히 말해 무용지물이다.
② 그런데 후영이 이상하다. 공자가 작별 인사를 하러 이문(夷门)에 들렀는데, 후영이 “공자께서 힘쓰십시오, 늙은 신은 따를 수 없습니다”라고 말하며 태연히 배웅한다. 함께 죽으러 가는 제자가 스승에게 마지막 인사를 하는데, 스승이 “그래 잘 가” 하는 것이다. 공자는 몇 리를 가다가 점점 불쾌감과 위화감이 밀려온다. “내가 후영을 온 천하가 부러워할 정도로 정성껏 모셨는데, 내가 죽으러 가는데 한마디 조언도 없다고? 이게 말이 되나?” 그래서 수레를 돌려 다시 후영에게 돌아간다.
③ 후영이 웃는다. “신은 진즉 공자께서 돌아오실 줄 알았습니다(臣固知公子之还也).” 이 웃음이 모든 것을 말해준다. 후영은 일부러 배웅하지 않은 것이다. 만약 공자가 그냥 가버렸다면 — 즉 자기 의리(죽음)에 집착해서 현명한 조언을 구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면 — 그는 진짜 죽을 값밖에 안 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후영은 의도적으로 무관심한 척하여 공자를 ‘되돌아 생각하게’ 만든 것이다. 이것이 첫 번째 시험이다.
④ 이제 후영이 본격적으로 가르친다: “지금 공자가 하려는 것은 고기를 굶주린 호랑이에게 던지는 격(以肉投馁虎)입니다. 무슨 공이 있겠습니까?” 이 한마디로 공자의 자살 돌격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깨닫게 한다. 죽으러 가는 것은 용기가 아니라 무책임이다. 그리고 결정타: “그런데 무슨 일로 평소에 식객을 기르십니까(尚安事客)?” — 즉, 식객을 기른 의미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공자는 충격을 받고 두 번 절하며 “그럼 어떻게 해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⑤ 후영이 사람을 물리고 은밀히 계책을 알려준다. 계획은 단순하면서도 대담하다:
- 왕의 침실에는 항상 진비의 병부(兵符/호부)가 보관되어 있다.
- 왕이 가장 총애하는 후궁 여희(如姬)가 침실을 자유롭게 드나든다.
- 그녀는 병부를 훔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⑥ 그런데 문제: 여희가 왜 목숨을 걸고 도와줘야 하는가? 여기서 후영이 결정타를 던진다. “후영이 듣기로, 여희의 아버지가 사람에게 살해되었는데 3년간 원수를 갚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공자께서 식객을 시켜 그 원수의 목을 베어 바쳤습니다. 여희는 공자를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다만 그 빚을 갚을 기회가 없었을 뿐입니다.”
즉, 공자는 이미 오래전에 ‘미래의 자산’을 쌓아둔 것이다. 신릉군이 평소에 남을 도울 때는 단순한 의리나 선의였지만, 그 선의가 지금 기하급수적인 효과를 발휘한다. 공자가 과거에 여희의 아버지 원수를 갚아주지 않았다면, 이 계획은 성립할 수 없었다. ‘덕(德)이 빚이 되어 돌아오는 순간’이다.
⑦ 가장 중요한 뉘앙스: ‘窃符(절부)‘가 아니라 ‘请符(청부)‘다. 자칫 이 계획은 공자가 몰래 병부를 훔치는 도둑 역할로 비칠 수 있다. 하지만 후영의 전략은 공자가 여희에게 직접 부탁하는 것이다. 여희는 은혜를 갚고자 자발적으로 훔쳐서 공자에게 준다. 공자는 위험을 감수해서라도 여희에게 간청하는 입장이고, 여희는 그 간청에 응하는 입장이다. 이 미묘한 역할 분담이 신릉군의 인격(절도를 직접 지시하지 않음)을 보호해준다.
⑧ 결과적으로 이 계획은 세 가지 층위의 인간관계가 맞물려 돌아간다: 후영의 지혜(계책) → 여희의 은혜(병부 제공) → 주해의 용기(진비 처단). 한 사람의 능력이 아니라, 신릉군이 평소에 쌓아온 인맥과 신뢰가 하나의 시너지(롤라팔루자 효과)를 발휘한 것이다. 이것이 이 장면이 단순한 군사 전략 이상으로 감동적인 이유다.
⑦ 진비 살해와 구원
원문: 公子行,侯生曰:“将在外,主令有所不受,以便国家。公子即合符,而晋鄙不授公子兵而复请之,事必危矣。臣客屠者硃亥可与俱,此人力士。晋鄙听,大善;不听,可使击之。“於是公子泣。侯生曰:“公子畏死邪?何泣也?“公子曰:“晋鄙嚄唶宿将,往恐不听,必当杀之,是以泣耳,岂畏死哉?“於是公子请硃亥。硃亥笑曰:“臣乃市井鼓刀屠者,而公子亲数存之,所以不报谢者,以为小礼无所用。今公子有急,此乃臣效命之秋也。“遂与公子俱。公子过谢侯生。侯生曰:“臣宜从,老不能。请数公子行日,以至晋鄙军之日,北乡自刭,以送公子。“公子遂行。 至鄴,矫魏王令代晋鄙。晋鄙合符,疑之,举手视公子曰:“今吾拥十万之众,屯於境上,国之重任,今单车来代之,何如哉?“欲无听。硃亥袖四十斤铁椎,椎杀晋鄙,公子遂将晋鄙军。勒兵下令军中曰:“父子俱在军中,父归;兄弟俱在军中,兄归;独子无兄弟,归养。“得选兵八万人,进兵击秦军。秦军解去,遂救邯郸,存赵。赵王及平原君自迎公子於界,平原君负籣矢为公子先引。赵王再拜曰:“自古贤人未有及公子者也。“当此之时,平原君不敢自比於人。公子与侯生决,至军,侯生果北乡自刭。 번역: 공자가 떠나려 하자 후생이 말했다: “장군은 밖에 있을 때 군주의 명령도 받지 않는 법입니다(将在外, 主令有所不受), 국가를 편리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공자가 호부를 맞춰도 진비가 공자에게 병권을 주지 않고 다시 청하면 일이 반드시 위태로워집니다. 신의 식객인 푸줏간 주인 주해(硃亥)를 함께 데려가십시오. 이 사람은 힘센 장사입니다. 진비가 듣는다면 잘된 것이고, 듣지 않으면 그를 치게 하십시오.” 이에 공자가 울었다. 후생이 말했다: “공자가 죽음을 두려워하십니까? 왜 우십니까?” 공자가 말했다: “진비는 늠름한 노장(宿将)입니다. 가서 듣지 않으면 반드시 죽여야 합니다. 그것 때문에 우는 것이지,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겠습니까?” 이에 공자가 주해를 청했다. 주해가 웃으며 말했다: “신은 시장에서 칼을 다루는 푸줏간 주인일 뿐인데, 공자께서 여러 번 직접 찾아주셨습니다. 답례하지 않은 것은 작은 예의가 쓸모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공자께서 급한 일이 있으니, 이것이 신이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마침내 공자와 함께 갔다. 공자가 후생에게 작별 인사를 하자 후생이 말했다: “신은 따라가야 마땅하나 늙어 할 수 없습니다. 공자의 행군 날수를 세어, 진비의 군영에 도착하는 날 북쪽을 향해 자결하여 공자를 전송하겠습니다.” 공자가 마침내 떠났다. 업(鄴)에 도착해 위왕의 명령을 속여 진비를 대체했다. 진비가 호부를 확인하고 의심하며 손을 들어 공자를 보며 말했다: “지금 내가 10만 대중을 거느리고 국경에 주둔하며 나라의 중임을 맡고 있는데, 지금 단 한 대의 수레로 와서 나를 대체한다니, 이게 어찌 된 일인가?” 듣지 않으려 했다. 주해가 소매 속에 40근 쇠몽둥이를 숨겼다가 내리쳐 진비를 죽였다. 공자가 마침내 진비의 군대를 장악했다. 군대를 정리하며 군중에 명령했다: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군중에 있으면 아버지는 돌아가라. 형제가 함께 있으면 형은 돌아가라. 독자로 형제가 없으면 돌아가 봉양하라.” 이에 8만 정병을 선발해 진군을 공격했다. 진군이 포위를 풀고 물러나 한단이 구원되고 조나라가 보존되었다. 조왕과 평원군이 직접 경계에서 공자를 영접했고, 평원군이 화살통을 메고 공자의 앞길을 인도했다. 조왕이 두 번 절하며 말했다: “예로부터 어진 사람으로 공자에 미치는 이가 없습니다.” 이때 평원군은 감히 남과 자신을 비교하지 못했다. 공자가 후생과 결별한 후 군영에 도착했을 때, 후생은 과연 북쪽을 향해 자결했다.
일련의 사건들이 마치 그리스 비극처럼 진행된다:
- 후영의 마지막 예언 — 진비가 의심할 것을 예견하고 주해를 보낸다
- 공자의 눈물 — 죽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무고한 노장(진비)을 죽여야 하는 도덕적 고통
- 주해의 각오 — “이것이 신이 목숨을 바칠 때입니다” — 은둔자가 결전의 순간에 나서다
- 후영의 북향 자결 — 배신의 책임을 지고 제자(절개)를 지킨다
- 군대 재편성 — 가족을 보내 주고 8만 정병만 선발한 인간적 배려
- 평원군이 화살통을 메고 앞길 인도 — 가장 격식 높은 예우
사마천의 서사는 단순한 역사기록이 아니라 하나의 완결된 드라마다: 시작(하사), 갈등(진군의 위협), 절정(절부구조), 반전(진비 살해), 해결(한단 구원), 대가(후영 자결).
제4절: 조 망명과 겸손의 회복
섹션 제목: “제4절: 조 망명과 겸손의 회복”⑧ 객의 충고 — 겸손의 의미
원문: 魏王怒公子之盗其兵符,矫杀晋鄙,公子亦自知也。已卻秦存赵,使将将其军归魏,而公子独与客留赵。赵孝成王德公子之矫夺晋鄙兵而存赵,乃与平原君计,以五城封公子。公子闻之,意骄矜而有自功之色。客有说公子曰:“物有不可忘,或有不可不忘。夫人有德於公子,公子不可忘也;公子有德於人,原公子忘之也。且矫魏王令,夺晋鄙兵以救赵,於赵则有功矣,於魏则未为忠臣也。公子乃自骄而功之,窃为公子不取也。“於是公子立自责,似若无所容者。赵王埽除自迎,执主人之礼,引公子就西阶。公子侧行辞让,从东阶上。自言罪过,以负於魏,无功於赵。赵王侍酒至暮,口不忍献五城,以公子退让也。公子竟留赵。赵王以鄗为公子汤沐邑,魏亦复以信陵奉公子。公子留赵。 번역: 위왕은 공자가 병부를 훔쳐 진비를 죽인 것에 분노했고, 공자 자신도 그것을 알고 있었다. 이미 진을 물리치고 조를 보존한 후, 장수를 시켜 군대를 위로 돌려보내고 공자만 홀로 식객들과 조에 남았다. 조효성왕이 공자가 진비의 병권을 빼앗아 조를 보존한 것을 감사히 여겨 평원군과 의논해 다섯 성을 공자에게 봉하려 했다. 공자가 이를 듣고 의기양양하여 스스로 공을 세운 듯한 표정이 있었다. 객(식객) 중에 공자에게 말하는 자가 있었다: “사물은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있고, 잊어야 할 것도 있습니다. 남이 공자에게 베푼 은덕은 공자가 잊지 말아야 하고, 공자가 남에게 베푼 은덕은 원컨대 공자가 잊으시기 바랍니다. 또 위왕의 명령을 속이고 진비의 병권을 빼앗아 조를 구한 것은 조에게는 공이지만, 위에게는 충신이 아닙니다. 공자가 스스로 교만해져 그것을 공으로 여기니, 신은 공자의 처사가 옳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공자가 즉시 스스로를 책망하며, 마치 용납할 곳이 없는 듯했다. 조왕이 길을 청소하고 직접 맞이하며 주인의 예를 갖추어 공자를 서쪽 섬돌로 인도하려 했다. 공자는 옆으로 걸어가며 사양하고 동쪽 섬돌로 올라갔다. 스스로 죄과를 말하며, 위에 죄를 지었고 조에는 공이 없다고 했다. 조왕이 밤이 이슥토록 술자리를 함께하며 차마 다섯 성을 바친다고 말하지 못했다 — 공자가 사양하기 때문이었다. 공자는 끝내 조에 머물렀다. 조왕이 공자에게 고(鄗)를 탕목읍(湯沐邑)으로 주었고, 위도 다시 신릉(信陵)을 공자의 봉지로 주었다. 공자는 조에 머물렀다.
이 장면은 신릉군의 인격적 성숙을 그린다. 공을 세우고 자만하다가, 한 식객의 충고에 즉시 반성한다. “物有不可忘,或有不可不忘” — 잊지 말아야 할 것과 잊어야 할 것을 구분하라는 이 말은 겸손의 본질을 꿰뚫는다. 조왕이 차마 다섯 성을 주겠다고 말하지 못한 것은 공자의 사양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⑨ 모공과 설공 — 진정한 현인(賢人)
원문: 公子闻赵有处士毛公藏於博徒,薛公藏於卖浆家,公子欲见两人,两人自匿不肯见公子。公子闻所在,乃间步往从此两人游,甚欢。平原君闻之,谓其夫人曰:“始吾闻夫人弟公子天下无双,今吾闻之,乃妄从博徒卖浆者游,公子妄人耳。“夫人以告公子。公子乃谢夫人去,曰:“始吾闻平原君贤,故负魏王而救赵,以称平原君。平原君之游,徒豪举耳,不求士也。无忌自在大梁时,常闻此两人贤,至赵,恐不得见。以无忌从之游,尚恐其不我欲也,今平原君乃以为羞,其不足从游。“乃装为去。平原君乃免冠谢,固留公子。平原君门下闻之,半去平原君归公子,天下士复往归公子,公子倾平原君客。 번역: 공자가 조나라에 은사 모공(毛公)이 도박꾼들 사이에 숨었고, 설공(薛公)이 식초 장수 집에 숨었다는 것을 듣고 두 사람을 만나려 했다. 두 사람이 스스로 숨어 공자를 만나주지 않았다. 공자가 있는 곳을 듣고는 은밀히 걸어가서 두 사람을 따라다니며 함께 놀았다. 매우 즐거워했다. 평원군이 이 말을 듣고 그 부인(공자의 누이)에게 말했다: “처음에 내가 부인의 아우 공자가 천하에 둘도 없다고 들었는데, 지금 들으니 도박꾼과 식초 장수 파는 자들과 어울려 다닌다니, 공자는 망령된 사람일 뿐이다.” 부인이 이 말을 공자에게 알렸다. 공자가 부인에게 작별하고 떠나려 하며 말했다: “처음에 내가 평원군이 현명하다 듣고, 위왕을 저버리고 조를 구해 평원군에게 보답했다. 평원군의 사귐은 그저 호걸스러운 체하는 것일 뿐, 진정으로 선비를 구하지 않는다. 무기가 대량에 있을 때부터 이 두 사람이 현명하다 들었는데, 조에 와서도 만나지 못할까 두려워했다. 무기가 그들과 함께 사귀는 것도 오히려 그들이 나를 원하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지금 평원군이 그것을 부끄러워한다니, 평원군은 따라 사귈 가치가 없다.” 이에 짐을 꾸려 떠나려 했다. 평원군이 관(冠)을 벗고 사죄하며 굳이 공자를 붙잡았다. 평원군의 식객들이 이 말을 듣고 절반이 평원군을 떠나 공자에게로 갔다. 천하의 선비들이 다시 공자에게로 돌아와, 공자가 평원군의 식객을 모두 빼앗았다.
이 장면은 신릉군과 평원군의 본질적 차이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 항목 | 신릉군 | 평원군 |
|---|---|---|
| 하사의 기준 | 인격(어짊)만 본다 | 지위·명성을 본다 |
| 대접 방식 | 진심으로 낮춘다 | 의례적으로 대접한다 |
| 은자에 대한 태도 | 찾아가서 따를 각오 | “망령된 사람”이라 비웃음 |
| 결과 | 평원군 식객의 절반을 흡수 | 인재를 다 빼앗김 |
“徒豪举耳,不求士也” — 평원군의 사귐은 “그냥 호걸 흉내”일 뿐, 진정으로 선비를 구하는 게 아니다. 이것이 사마천이 신릉군을 사군자 중 유일하게 ‘진짜 하사’로 평가한 이유다.
제5절: 귀국과 5국 연합 대승
섹션 제목: “제5절: 귀국과 5국 연합 대승”⑩ 모공·설공의 설득과 귀국
원문: 公子留赵十年不归。秦闻公子在赵,日夜出兵东伐魏。魏王患之,使使往请公子。公子恐其怒之,乃诫门下:“有敢为魏王使通者,死。“宾客皆背魏之赵,莫敢劝公子归。毛公、薛公两人往见公子曰:“公子所以重於赵,名闻诸侯者,徒以有魏也。今秦攻魏,魏急而公子不恤,使秦破大梁而夷先王之宗庙,公子当何面目立天下乎?“语未及卒,公子立变色,告车趣驾归救魏。 번역: 공자가 조에 10년을 머물며 돌아가지 않았다. 진은 공자가 조에 있는 것을 알고, 밤낮으로 군대를 내어 동쪽의 위를 침공했다. 위왕이 이를 걱정하여 사자를 보내 공자를 청했다. 공자가 위왕이 노할까 두려워 문객들에게 경고했다: “위왕의 사자를 통하게 하는 자가 있으면 죽인다.” 빈객들은 모두 위를 등지고 조에 붙어, 감히 공자에게 귀국을 권하는 자가 없었다. 모공과 설공 두 사람이 공자를 찾아와 말했다: “공자가 조에서 중시되고 제후들에게 이름이 알려진 것은, 다만 위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이 위를 공격하는데 위가 급박한데도 공자가 돌보지 않아, 진이 대량을 함락시키고 선왕의 종묘를 파괴하게 한다면 공자는 무슨 낯으로 천하에 서겠습니까?”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공자가 즉시 안색을 바꾸고 수레를 준비시켜 달려가 위를 구원하게 했다.
모공과 설공의 논리는 완벽하다: “公子所以重於赵,名闻诸侯者,徒以有魏也” — 네가 조에서 중시받는 이유는 위나라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위가 망하면 너의 존재 가치도 사라진다. 10년 만의 귀국 — 위왕과 포옹하고 울었다는 생략된 감동.
⑪ 5국 연합, 진을 함곡관까지 격파
원문: 魏王见公子,相与泣,而以上将军印授公子,公子遂将。魏安釐王三十年,公子使使遍告诸侯。诸侯闻公子将,各遣将将兵救魏。公子率五国之兵破秦军於河外,走蒙骜。遂乘胜逐秦军至函谷关,抑秦兵,秦兵不敢出。当是时,公子威振天下,诸侯之客进兵法,公子皆名之,故世俗称魏公子兵法。 번역: 위왕이 공자를 만나 함께 울고 상장군(上将军)의 인수를 주었다. 공자가 마침내 군사를 지휘했다. 위안희왕 30년, 공자가 사자를 보내 제후들에게 두루 알렸다. 제후들이 공자가 장수임을 듣고 각각 장수를 보내 군대를 보내 위를 구원하게 했다. 공자가 5국의 군대를 이끌고 하외(河外)에서 진군을 격파하고 몽오(蒙骜)를 달아나게 했다. 승세를 타서 진군을 함곡관(函谷关)까지 추격하며 진병을 억누르니, 진병이 감히 나오지 못했다. 이때 공자의 위엄이 천하를 진동했다. 제후들의 식객들이 병법을 바치면 공자가 모두 그 이름을 자신의 이름으로 붙였기에, 세상에서 ‘위공자병법(魏公子兵法)‘이라 불렀다.
신릉군 인생의 절정. 단독으로도 아니고 5국 연합군을 지휘해, 진의 핵심 요새 함곡관까지 밀어붙였다. 이 순간 진은 통일 직전의 무적 군단이었지만 신릉군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秦兵不敢出” — 진군이 감히 나오지 못했다. 이것이 신릉군의 마지막 승리였다.
제6절: 반간계와 최후
섹션 제목: “제6절: 반간계와 최후”⑫ 반간과 실각
원문: 秦王患之,乃行金万斤於魏,求晋鄙客,令毁公子於魏王曰:“公子亡在外十年矣,今为魏将,诸侯将皆属,诸侯徒闻魏公子,不闻魏王。公子亦欲因此时定南面而王,诸侯畏公子之威,方欲共立之。“秦数使反间,伪贺公子得立为魏王未也。魏王日闻其毁,不能不信,後果使人代公子将。公子自知再以毁废,乃谢病不朝,与宾客为长夜饮,饮醇酒,多近妇女。日夜为乐饮者四岁,竟病酒而卒。其岁,魏安釐王亦薨。 번역: 진왕이 이를 걱정해 만금(萬金)을 위에 뿌려 진비의 식객들을 구해 공자를 위왕에게 참소하게 했다: “공자는 10년 동안 밖에 망명해 있다가 지금 위의 장수가 되었습니다. 제후의 장수들이 모두 따르니, 제후들은 위왕만 듣지 않고 위공자만 듣습니다. 공자도 이 기회에 남면하여 왕이 되려 하며, 제후들도 공자의 위엄을 두려워하여 함께 그를 세우려 합니다.” 진이 여러 차례 반간(反間)을 쓰며 거짓으로 공자가 위왕이 되었는지 축하했다. 위왕이 날마다 그 참소를 듣고 믿지 않을 수 없어, 결국 사람을 보내 공자를 대신해 장군을 삼았다. 공자는 다시 참소로 실각했음을 알고 병을 칭해 조정에 나가지 않고 빈객들과 장음(長夜)의 술을 마시며 독한 술을 들고 여색을 가까이했다. 밤낮으로 즐기며 술 마신 지 4년 만에 결국 술병으로 죽었다. 그해 위안희왕도 죽었다.
신릉군의 최후는 전형적인 영웅의 비극적 몰락이다:
- 같은 패턴의 반복: 처음에는 ‘조왕 사냥’ 에피소드에서 정보력이 두려움을 샀고, 이번에는 군사력이 두려움을 샀다.
- 反间(반간)의 완벽한 성공: 진이 쓴 천금은 참소를 사는 데 썼다. 진비의 식객들이 복수에 나선 것.
- 자기 파괴: 병을 칭하고 주색에 빠져 4년 만에 죽었다 — 일종의 자살이었다. 그의 몰락 속도는 그의 능력이 얼마나 컸는지 반증한다.
- “再以毁废” — 또 참소로 실각했다. 다시. 한 번이 아니라 두 번. 신릉군의 운명은 ‘두려움’이었다.
⑬ 위나라의 최후
원문: 秦闻公子死,使蒙骜攻魏,拔二十城,初置东郡。其後秦稍蚕食魏,十八岁而虏魏王,屠大梁。 번역: 진이 공자의 죽음을 듣고 몽오를 보내 위를 공격해 20개 성을 함락하고 비로소 동군(東郡)을 설치했다. 그 후 진이 조금씩 위를 잠식해 18년 만에 위왕을 사로잡고 대량을 도륙했다.
신릉군의 죽음은 위나라의 사형 선고였다. 그는 살아 있을 때 5국의 군대를 이끌었지만, 그가 없자 위는 18년 만에 멸망했다. 한 사람이 국가의 운명과 직결된 경우.
제7절: 고조 유방의 제사
섹션 제목: “제7절: 고조 유방의 제사”원문: 高祖始微少时,数闻公子贤。及即天子位,每过大梁,常祠公子。高祖十二年,从击黥布还,为公子置守冢五家,世世岁以四时奉祠公子。 번역: 한고조(유방)가 미천하고 젊었을 때 여러 번 공자가 현명하다 들었다. 천자가 된 후 대량을 지날 때마다 항상 공자에게 제사했다. 고조 12년, 경포(黥布)를 치고 돌아오는 길에 공자를 위해 수묘(守冢) 5가를 두어, 대대로 해마다 사계절 공자에게 제사하게 했다.
사마천은 이 열전을 단순한 전기가 아니라 역사의 평가로 마무리한다. 한 고조 유방 — 천하를 통일한 황제 — 이 신릉군에게 제사했다는 사실로, 신릉군의 명성이 시대를 초월했음을 증명한다. 유방이 존경한 인물은 신릉군뿐이었다(사기 고조본기에도 언급됨).
제8절: 태사공의 평가
섹션 제목: “제8절: 태사공의 평가”원문: 太史公曰:吾过大梁之墟,求问其所谓夷门。夷门者,城之东门也。天下诸公子亦有喜士者矣,然信陵君之接岩穴隐者,不耻下交,有以也。名冠诸侯,不虚耳。高祖每过之而令民奉祠不绝也。 信陵下士,邻国相倾。以公子故,不敢加兵。颇知硃亥,尽礼侯嬴。遂卻晋鄙,终辞赵城。毛、薛见重,万古希声。 번역: 태사공이 말한다: 내가 대량의 옛터를 지나며 이문(夷門)이 무엇인지 물었다. 이문은 성의 동문이었다. 천하의 제후 공자들 중에도 선비를 좋아하는 자들이 있었지만, 신릉공이 바위굴의 은자들과 교제하고 낮은 이와 사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은 것은 까닭이 있는 것이다. 명성이 제후들 위에 있음이 허명이 아니다. 고조께서 지날 때마다 백성들로 하여금 제사를 끊지 않게 했다. 신릉군이 선비에게 몸을 낮추니 이웃 나라들이 기울었다. 공자 때문에 감히 병사를 움직이지 못했다. 주해를 깊이 알고 후영에게 예를 다했다. 이에 진비를 물리치고 마침내 조의 성을 사양했다. 모공과 설공이 중시되니, 만고에 보기 드문 일이다.
사마천의 평가에서 가장 주목할 점:
- “不耻下交” — 낮은 이와 사귀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사마천이 사군자 중 신릉군에게만 이 말을 썼다.
- “接岩穴隐者” — 바위굴의 은자와 교류했다. 후영(문지기)·주해(푸줏간)·모공(도박꾼)·설공(식초장수) — 이 모든 인물이 ‘은자’였다.
- “名冠诸侯,不虚耳” — 명성이 제후를 압도한 것이 결코 허명이 아니다.
- 사마천 자신의 대량 방문 기록을 넣어 현장감을 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