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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본기 (周本紀) 원문과 번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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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史記) 권사(卷四) 본기제사(本紀第四)


🏛️ 제1부: 마스터 가이드 & 핵심 통찰

섹션 제목: “🏛️ 제1부: 마스터 가이드 & 핵심 통찰”

💡 본질: 주본기는 중국 역사상 최장수 왕조 주(周, 기원전 1046~256년, 약 800년)의 대서사시다. 상나라의 신권 정치를 대체하여 ‘천명(天命)은 덕(德)이 있는 자에게만 머문다’는 도덕적 인문주의 사상을 창시했다. 문왕(文王)의 인덕 축적, 강태공(姜太公)의 영입, 무왕(武王)의 목야대전(牧野之戰), 그리고 어린 성왕을 보좌해 제도를 완성한 주공 단(周公 旦)의 봉건제·종법제·예악(禮樂) 거버넌스는 향후 2,000년간 동아시아 문명과 유교 정치철학의 영원한 표준(Classic)이 되었다. 동시에 유왕(幽王)의 포사(褒姒) 총애와 봉화 장난으로 인한 서주 멸망, 평왕의 동천(東遷) 이후 춘추전국시대의 개막이라는 제도의 엔트로피 과정도 생생히 보여준다.

제도/사상핵심 메커니즘역사적/현대적 의의
천명(天命)과 덕치(德治)왕은 신의 자손이 아니라 하늘의 대리인이며, 덕을 잃으면 교체됨(혁명)절대 권력에 도덕적 정당성과 책임을 부과한 최초의 인문학적 정치철학
봉건제(封建制)와 종법(宗法)혈연 종족(적장자 상속)을 전국 거점에 분봉하여 왕실의 울타리(藩屛) 구축광대한 영토를 통신/교통 한계 속에서 효율적으로 경영한 분산 네트워크 거버넌스
예악(禮樂) 시스템법과 형벌 대신 신분별 예법(禮)과 조화의 음악(樂)으로 사회 질서 내면화강제력이 아닌 문화적 소프트 파워를 통한 자발적 규율과 질서 유지

2. 핵심 멘탈 모델 및 정치적 교훈

섹션 제목: “2. 핵심 멘탈 모델 및 정치적 교훈”

① 주공(周公)의 무사(無私) 섭정과 권력 이양

섹션 제목: “① 주공(周公)의 무사(無私) 섭정과 권력 이양”
  • 어린 성왕을 대신해 7년간 섭정하며 삼감의 난을 진압하고 제도를 완성한 뒤, 성왕이 장성하자 아무 미련 없이 권력을 반환함.
  • 교훈: 위대한 시스템 빌더는 권력을 탐하지 않고 자신이 만든 시스템이 스스로 돌아가도록 설계하고 떠난다.

② 시스템의 노후화와 신뢰 붕괴 (포사의 봉화극)

섹션 제목: “② 시스템의 노후화와 신뢰 붕괴 (포사의 봉화극)”
  • 유왕이 웃지 않는 왕비 포사를 웃기려고 거짓 봉화를 올려 제후들을 농락하자, 정작 견융이 침략했을 때 아무도 구원하러 오지 않음.
  • 교훈: 위기 경보 시스템(Alert System)과 리더의 신뢰를 사적 유희를 위해 남용하면 결정적 순간에 조직 전체가 전멸한다.

③ 삼과가문과 공류의 농경 축적 — 바텀업 혁신의 힘

섹션 제목: “③ 삼과가문과 공류의 농경 축적 — 바텀업 혁신의 힘”
  • 서쪽 변방에서 융적과 섞여 살면서도 농경 기술을 닦고 백성을 부유하게 만들어 자연스러운 인구 유입과 경제적 우위를 확보함.
  • 교훈: 진정한 정치적 패권은 화려한 명분이 아니라 실질적인 생산력과 민생의 안정이라는 펀더멘털에서 비롯된다.

📜 제2부: 원문 상세 대역 (Full Reference)

섹션 제목: “📜 제2부: 원문 상세 대역 (Full Reference)”

周后稷名弃。其母有邰氏女曰姜原。姜原为帝喾元妃。姜原出野见巨人迹心忻然说欲践之践之而身动如孕者。居期而生子以为不祥弃之隘巷马牛过者皆辟不践;徙置之林中適会山林多人迁之;而弃渠中冰上飞鸟以其翼覆荐之. 姜原以为神遂收养长之. 初欲弃之因名曰弃.

번역: 주나라 후직(后稷)의 이름은 기(弃)다. 그의 어머니는 유태씨(有邰氏)의 딸 강원(姜原)이다. 강원은 제곡(帝嚳)의 정비였다. 강원이 들에 나갔다가 거인의 발자국을 보고 마음이 기뻐 밟아보고 싶어 밟았더니 몸이 움직이며 임신한 것 같았다. 기한이 차서 아들을 낳았으나 상서롭지 못하다고 여겨 좁은 골목에 버렸는데, 지나가는 말과 소들이 모두 피하고 밟지 않았다. 숲속으로 옮겨 두었으나 마침 산림에 사람이 많아 옮겼고, 도랑의 얼음 위에 버렸으나 날아가는 새들이 날개로 덮어주었다. 강원이 신기하게 여겨 마침내 거두어 길렀다. 처음에 버리려 했으므로 이름을 기(弃, 버리다)라고 했다.

주석: 주나라의 기원은 ‘거인의 발자국’이라는 신비로운 수태 설화로 시작된다. 이는 상나라의 ‘현조의 알’ 설화와 대비되면서도, 하늘의 명(天命)을 받은 가문임을 강조하는 공통점을 가진다. 특히 버려진 아이를 짐승과 자연이 보호했다는 ‘기아(棄兒) 모티프’는 고대 영웅 신화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2. 부주(不窋)에서 공류(公劉)까지 — 주나라의 재기

섹션 제목: “2. 부주(不窋)에서 공류(公劉)까지 — 주나라의 재기”

后稷卒子不窋立. 不窋末年夏后氏政衰去稷不务不窋以失其官而饹戎狄之间. 不窋卒子鞠立. 鞠卒子公刘立. 公刘虽在戎狄之间复脩后稷之业务耕种行地宜自漆、沮度渭取材用行者有资居者有畜积民赖其庆. 百姓怀之多徙而保归焉. 周道之兴自此始故诗人歌乐思其德.

번역: 후직이 죽고 아들 부주(不窋)가 섰다. 부주 말년에 하나라의 정치가 쇠퇴하여 농사(稷)를 돌보지 않자 부주는 관직을 잃고 융적(戎狄)의 땅으로 도망갔다. 부주가 죽고 아들 국(鞠)이 섰고, 국이 죽고 아들 공류(公劉)가 섰다. 공류는 비록 융적의 땅에 있었으나 다시 후직의 업을 닦아 농사에 힘쓰고 땅의 적합함을 살펴 칠수와 저수에서 위수를 건너 재목을 구하니, 길 떠나는 자는 노잣돈이 있고 머무는 자는 저축이 있어 백성이 그 경사에 의지했다. 백성들이 그를 그리워하여 많이 이주해 와서 의탁하니 주나라의 도가 일어남이 여기서 시작되었다.

주석: 주나라는 농경 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유목 민족(융적) 사이에서 방황하던 시기가 있었다. 공류는 이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농경을 부흥시킨 중흥의 시조로 평가받는다. 이는 주나라가 단순히 무력으로 일어난 것이 아니라 경제적 자립과 백성의 자발적 귀순을 통해 기반을 닦았음을 보여준다.


3. 고공단보(古公亶父) — 기산 아래로의 천도

섹션 제목: “3. 고공단보(古公亶父) — 기산 아래로의 천도”

古公亶父复脩后稷、公刘之业积德行义国人皆戴之. 薰育戎狄攻之欲得财物予之. 已复攻欲得地与民. 民皆怒欲战. 古公曰:“有民立君将以利之. 今戎狄所为攻战以吾地与民. 民之在我与其在彼何异. 民欲以我故战杀人父子而君之予不忍为.” 乃与私属遂去豳度漆、沮逾梁山止於岐下. 豳人举国扶老携弱尽复归古公於岐下.

번역: 고공단보가 다시 후직과 공류의 업을 닦고 덕을 쌓고 의를 행하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받들었다. 훈육(薰育)과 융적이 공격해와 재물을 얻고자 하니 주었다. 다시 공격해와 땅과 백성을 얻고자 하니 백성들이 모두 노해 싸우고자 했다. 고공이 말했다: “백성이 군주를 세우는 것은 이롭게 하기 위함이다. 지금 융적이 공격하는 이유는 나의 땅과 백성 때문이다. 백성이 나에게 있는 것과 저들에게 있는 것이 무엇이 다르겠는가. 백성이 나 때문에 싸워 남의 부자를 죽이면서 내가 군주 노릇을 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이에 사속(私屬)들과 함께 빈(豳) 땅을 떠나 칠수와 저수를 건너 양산을 넘어 기산(岐山) 아래에 멈추었다. 빈 땅 사람들이 나라 전체가 노인을 부축하고 어린이를 이끌고 모두 기산 아래의 고공에게 돌아왔다.

주석: 고공단보의 양보는 유가적 ‘인(仁)‘의 극치를 보여주는 사례다.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백성을 희생시키지 않겠다는 그의 태도는 오히려 더 큰 민심의 결집을 가져왔다. 기산 아래로의 천도는 주나라가 본격적으로 중원 세력으로 성장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古公有长子曰太伯次曰虞仲. 太姜生少子季历季历娶太任皆贤妇人生昌有圣瑞. 古公曰:“我世当有兴者其在昌乎?” 长子太伯、虞仲知古公欲立季历以传昌乃二人亡如荆蛮文身断以让季历.

번역: 고공에게는 장남 태백(太伯)과 차남 우중(虞仲)이 있었다. 태강(太姜)이 막내 계력(季历)을 낳았는데, 계력이 태임(太任)에게 장가드니 모두 현숙한 부인이었고 창(昌, 훗날의 문왕)을 낳을 때 성스러운 상서가 있었다. 고공이 말했다: “우리 대에 반드시 일어날 자가 있을 것인데, 아마 창이겠구나!” 장남 태백과 우중은 고공이 계력을 세워 창에게 전해주고 싶어 함을 알고, 두 사람이 형만(荆蛮)으로 도망가 몸에 문신을 하고 머리를 잘라 계력에게 양보했다.

주석: 태백과 우중의 양보는 공자가 “지덕(至德, 지극한 덕)“이라고 찬양한 고사다. 당시의 관습을 깨고 동생에게 왕위를 양보하기 위해 스스로 야만인의 풍습(문신과 단발)을 따름으로써 돌아올 길을 끊은 결단은 주나라 왕실의 도덕적 권위를 상징한다.


5. 서백 창(西伯 昌) — 문왕의 덕치와 유리의 고난

섹션 제목: “5. 서백 창(西伯 昌) — 문왕의 덕치와 유리의 고난”

西伯曰文王遵后稷、公刘之业则古公、公季之法笃仁敬老慈少. 礼下贤者日中不暇食以待士士以此多归之. … 崇侯虎谮西伯於殷纣曰:“西伯积善累德诸侯皆乡之将不利於帝.” 帝纣乃囚西伯於羑里. 闳夭之徒患之. 乃求有莘氏美女… 献之纣. 纣大说… 乃赦西伯.

번역: 서백 창은 문왕이라 불리는데, 후직과 공류의 업을 따르고 고공과 공계의 법을 본받아 인을 두텁게 하고 노인을 공경하며 어린이를 사랑했다. 예로써 어진 이에게 몸을 낮추어 정오가 되도록 밥 먹을 겨를도 없이 선비를 기다리니 선비들이 이 때문에 많이 귀순했다. … 숭후호(崇侯虎)가 은나라 주왕에게 서백을 참소했다: “서백이 선을 쌓고 덕을 거듭하니 제후들이 모두 그에게 향하고 있어 폐하께 불리할 것입니다.” 주왕이 서백을 유리(羑里)에 가두었다. 굉요(闳夭)의 무리가 이를 걱정하여 유신씨의 미녀 등을 구해 주왕에게 바쳤다. 주왕이 크게 기뻐하며 서백을 사면했다.

주석: 문왕은 주나라 건국의 실질적인 설계자다. 유리에 갇혀 있는 동안 주역(周易)의 8괘를 64괘로 발전시켰다는 설화는 그의 지혜를 상징한다. 그는 무력보다는 ‘덕’으로 제후들의 마음을 얻었으며, 주왕의 폭정과 대비되는 ‘인군(仁君)‘의 표상이 되었다.


6. 무왕(武王)의 맹진 회군과 천명

섹션 제목: “6. 무왕(武王)의 맹진 회군과 천명”

九年武王上祭于毕. 东观兵至于盟津. … 是时诸侯不期而会盟津者八百诸侯. 诸侯皆曰:“纣可伐矣.” 武王曰:“女未知天命未可也.” 乃还师归.

번역: 9년에 무왕이 필(毕) 땅에서 제사를 지내고 동쪽으로 군사를 사열하여 맹진(盟津)에 이르렀다. … 이때 제후들이 기약하지 않고 맹진에 모인 자가 800명이었다. 제후들이 모두 말했다: “주왕을 정벌할 만합니다.” 무왕이 말했다: “너희는 아직 천명을 모른다. 아직 안 된다.” 하고 군사를 돌려 돌아갔다.

주석: 800 제후가 모였음에도 “아직 천명이 아니다”라며 회군한 것은 무왕의 신중함과 정당성 확보를 보여준다. 이는 단순한 반란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완전히 기울었을 때 비로소 움직이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7. 목야(牧野)의 전투와 상나라의 멸망

섹션 제목: “7. 목야(牧野)의 전투와 상나라의 멸망”

二月甲子昧爽武王朝至于商郊牧野乃誓. … 纣师虽众皆无战之心心欲武王亟入. 纣师皆倒兵以战以开武王. 武王驰之纣兵皆崩畔纣. 纣走反入登于鹿台之上蒙衣其殊玉自燔于火而死.

번역: 2월 갑자일 새벽에 무왕이 상나라 교외인 목야에 이르러 맹세했다. … 주왕의 군대는 비록 많았으나 모두 싸울 마음이 없었고 속으로 무왕이 빨리 들어오기를 바랐다. 주왕의 군사들이 모두 무기를 거꾸로 잡고 싸우며 무왕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무왕이 달려드니 주왕의 군사들이 모두 무너져 주왕을 배반했다. 주왕은 달아나 돌아가 녹대(鹿台) 위에 올라가 보옥을 박은 옷을 입고 스스로 불 속에 뛰어들어 죽었다.

주석: 목야의 전투는 ‘역성혁명’의 정점이다. 주왕의 대군이 무기를 거꾸로 들었다는 ‘도병(倒兵)’ 기록은 민심이 이미 떠났음을 극적으로 보여준다. 무왕은 승리 후 주왕의 목을 베어 백기에 매달았으나, 동시에 은나라의 제사를 잇게 함으로써 승자의 아량을 보였다.


8. 무왕의 불면의 밤과 낙읍(洛邑) 계획

섹션 제목: “8. 무왕의 불면의 밤과 낙읍(洛邑) 계획”

武王至于周自夜不寐. 周公旦即王所曰:“曷为不寐?” 王曰:“… 我未定天保何暇寐!” … 营周居于雒邑而後去.

번역: 무왕이 주나라에 이르러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주공 단이 왕의 처소에 가서 물었다: “어찌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십니까?” 왕이 말했다: ”… 내가 아직 하늘의 보호를 확정 짓지 못했는데 어찌 잠잘 겨를이 있겠느냐!” … 낙읍(雒邑)에 주나라의 거처를 경영한 후에야 떠났다.

주석: 승리 후에도 무왕은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상나라의 잔존 세력을 감시하고 천하의 중심을 잡기 위해 낙읍(훗날의 낙양)을 건설할 계획을 세웠다. 이는 주나라가 서쪽 변방의 국가에서 천하의 주인으로 거듭나기 위한 전략적 고민을 보여준다.


9.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섭정

섹션 제목: “9. 성왕(成王)과 주공(周公)의 섭정”

成王少周初定天下周公恐诸侯畔周公乃摄行政当国. … 周公行政七年成王长周公反政成王北面就群臣之位.

번역: 성왕이 어리고 주나라가 막 천하를 평정했을 때, 주공은 제후들이 배반할까 두려워하여 정사를 대행하고 나라를 맡았다. … 주공이 정사를 행한 지 7년 만에 성왕이 장성하자 주공은 정권을 돌려주고 북면하여 신하의 자리에 앉았다.

주석: 주공 단은 중국 역사상 가장 완벽한 신하의 표상이다. 조카인 성왕을 대신해 섭정하며 ‘삼감의 난(三監之亂)‘을 진압하고 예악(禮樂)을 정비했으나, 왕이 장성하자 미련 없이 권력을 내려놓았다. 그의 헌신은 주나라 봉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10. 성강지치(成康之際) — 황금시대

섹션 제목: “10. 성강지치(成康之際) — 황금시대”

成康之际天下安宁刑错四十馀年不用.

번역: 성왕과 강왕(康王) 시대에는 천하가 안녕하여 형벌을 40여 년 동안이나 쓰지 않고 치워두었다.

주석: ‘형착(刑錯)‘은 형벌 기구를 창고에 넣어두고 쓰지 않았다는 뜻으로, 태평성대의 극치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주나라 초기 약 100년은 유가들이 꿈꾸는 이상적인 통치가 실현된 시기로 기록된다.


11. 소왕(昭王)의 불행과 목왕(穆王)의 정벌

섹션 제목: “11. 소왕(昭王)의 불행과 목왕(穆王)의 정벌”

昭王南巡狩不返卒於江上. … 穆王将征犬戎祭公谋父谏曰:“不可. 先王燿德不观兵. … 先王之制邦内甸服邦外侯服… 荒服者王. … 於是有刑不祭伐不祀征不享让不贡告不王.”

번역: 소왕이 남쪽으로 순행을 나갔다가 돌아오지 못하고 강 위에서 죽었다. … 목왕이 견융(犬戎)을 정벌하려 하자 제공 모보(祭公 谋父)가 간언했다: “안 됩니다. 선왕께서는 덕을 빛내셨지 무력을 과시하지 않으셨습니다. … 선왕의 제도에 따르면 나라 안은 전복(甸服), 밖은 후복(侯服)… 가장 먼 곳은 황복(荒服)이라 하여 왕(王, 조공만 함)하게 했습니다. … 제사를 지내지 않으면 형벌을 주고, 제사를 거르면 치고, 공물을 바치지 않으면 정벌하고, 조공하지 않으면 꾸짖고, 왕래하지 않으면 덕을 닦아야 합니다.”

주석: 소왕의 죽음은 주나라 왕실의 권위가 흔들리기 시작했음을 시사한다. 목왕은 이를 무력으로 해결하려 했으나, 제공 모보는 ‘5복(五服) 제도’를 들어 무리한 원정을 반대했다. 덕으로 다스리는 범위에 따라 대우를 달리해야 한다는 이 논리는 주나라 외교 정책의 핵심이다.


12. 보후(甫侯)의 형법 — 보형(甫刑)

섹션 제목: “12. 보후(甫侯)의 형법 — 보형(甫刑)”

诸侯有不睦者甫侯言於王作脩刑辟. … 五刑之疑有赦五罚之疑有赦其审克之. … 墨罚之属千劓罚之属千膑罚之属五百宫罚之属三百大辟之罚其属二百:五刑之属三千.

번역: 제후들 중에 화목하지 않은 자가 있자 보후(甫侯)가 왕에게 말하여 형법을 닦았다. … 5형(五刑)이 의심스러우면 사면하고, 5벌(五罚)이 의심스러우면 사면하되 신중히 살펴야 한다. … 묵형(墨罚)에 속하는 것이 1,000가지, 의형(劓罚)이 1,000가지, 빈형(膑罚)이 500가지, 궁형(宫罚)이 300가지, 대벽(大辟, 사형)이 200가지로 5형에 속하는 것이 총 3,000가지였다.

주석: 목왕 시대에 제정된 ‘보형’은 고대 중국 법제사의 중요한 기록이다. 형벌의 종류가 3,000가지에 달했다는 것은 사회가 복잡해지고 통제가 강화되었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의심스러우면 사면하라’는 원칙을 제시하여 법 집행의 신중함을 강조했다.


13. 여왕(厲王)의 폭정과 공화(共和) 행정

섹션 제목: “13. 여왕(厲王)의 폭정과 공화(共和) 행정”

厉王即位三十年好利近荣夷公. … 王行暴虐侈傲国人谤王. … 召公曰:“防民之口甚於防水. … ” 王不听. 於是国莫敢出言三年乃相与畔袭厉王. 厉王出奔於彘. 召公、周公二相行政号曰“共和”.

번역: 여왕이 즉위한 지 30년에 이익을 좋아하고 영이공(荣夷公)을 가까이했다. … 왕이 폭학하고 사치하며 오만하게 행하니 나라 사람들이 왕을 비방했다. … 소공이 말했다: “백성의 입을 막는 것은 물을 막는 것보다 더 위험합니다. … ” 왕이 듣지 않았다. 이에 나라에 감히 말을 내는 자가 없게 된 지 3년 만에 서로 배반하여 여왕을 습격했다. 여왕은 체(彘) 땅으로 달아났다. 소공과 주공 두 정승이 정사를 행하니 이를 ‘공화(共和)‘라 불렀다.

주석: 여왕은 ‘전리(專利, 이익을 독점함)‘와 ‘미방(弭謗, 비방을 막음)‘으로 상징되는 폭군이다. 백성의 입을 막으려 했던 그의 시도는 결국 폭동으로 이어졌고, 왕이 없는 상태에서 신하들이 다스리는 ‘공화’ 시대가 열렸다. 이는 동양 역사에서 매우 독특한 권력 공백기의 통치 형태다.


宣王即位二相辅之脩政法文、武、成、康之遗风诸侯复宗周. … 宣王不脩籍於千亩… 王师败绩于姜氏之戎.

번역: 선왕이 즉위하자 두 정승이 보좌하여 정사와 법도를 닦고 문·무·성·강의 유풍을 따르니 제후들이 다시 주나라를 받들었다. … 선왕이 천묘(千亩)에서 적전(籍田)의 예를 닦지 않더니… 왕의 군대가 강씨(姜氏)의 융적에게 대패했다.

주석: 선왕은 일시적으로 주나라를 중흥시켰으나, 말년에는 농경의 의례를 무시하고 무리한 전쟁을 벌이다 패배했다. 이는 주나라의 국력이 근본적으로 쇠퇴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전조였다.


15. 유왕(幽王)과 포사(襃姒) — 서주의 멸망

섹션 제목: “15. 유왕(幽王)과 포사(襃姒) — 서주의 멸망”

幽王嬖爱襃姒. … 襃姒不好笑幽王欲其笑万方故不笑. 幽王为烽燧大鼓有寇至则举烽火. 诸侯悉至至而无寇襃姒乃大笑. 幽王说之为数举烽火. 其後不信诸侯益亦不至. … 遂杀幽王骊山下.

번역: 유왕이 포사를 총애했다. … 포사가 웃음을 좋아하지 않아 유왕이 그녀를 웃게 하려 온갖 방법을 썼으나 웃지 않았다. 유왕이 봉화와 큰 북을 만들어 도적이 오면 봉화를 올리게 했다. 제후들이 모두 이르렀으나 도적이 없자 포사가 그제야 크게 웃었다. 유왕이 기뻐하여 자주 봉화를 올렸다. 그 후 제후들이 믿지 않아 더 이상 오지 않았다. … 마침내 유왕은 여산 아래에서 죽임을 당했다.

주석: ‘봉화희제후(烽火戏诸侯)’ 고사는 서주 멸망의 결정적 장면이다. 개인적인 애욕을 위해 국가의 안보 시스템을 농락한 결과, 실제 견융이 침입했을 때 아무도 돕지 않았다. 이로써 무왕이 세운 서주는 멸망하고 주나라는 동쪽으로 옮겨가게 된다.


平王立东迁于雒邑辟戎寇. 平王之时周室衰微诸侯彊并弱齐、楚、秦、晋始大政由方伯.

번역: 평왕이 즉위하여 낙읍으로 동쪽으로 옮겨 융적의 침입을 피했다. 평왕 시대에 주나라 왕실이 쇠미해지고 제후들이 강한 자가 약한 자를 병합하니 제나라, 초나라, 진(秦)나라, 진(晋)나라가 비로소 커졌고 정치는 방백(方伯, 패자)들에 의해 좌우되었다.

주석: 낙양으로의 천도는 주나라가 더 이상 천하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아님을 선포한 것과 다름없었다. 이때부터 춘추시대가 시작되며, 주 왕실은 명목상의 천자로 전락한다.


17. 동주의 쇠퇴와 춘추전국시대

섹션 제목: “17. 동주의 쇠퇴와 춘추전국시대”

桓王三年郑庄公朝桓王不礼. … 十三年伐郑郑射伤桓王桓王去归. … 釐王三年齐桓公始霸. … 定王元年楚庄王伐陆浑之戎次洛使人问九鼎.

번역: 환왕 3년에 정나라 장공이 입조했으나 환왕이 예우하지 않았다. … 13년에 정나라를 쳤으나 정나라 사람이 환왕을 화살로 쏘아 맞혔고 환왕은 물러나 돌아왔다. … 희왕 3년에 제나라 환공이 비로소 패자가 되었다. … 정왕 원년에 초나라 장공이 육혼의 융적을 치고 낙양에 머물며 사람을 보내 구정(九鼎)의 무게를 묻게 했다.

주석: 천자가 제후의 화살에 맞고, 제후가 천자의 상징인 구정의 무게를 묻는(문정중경) 사건들은 하극상의 시대상을 보여준다. 주나라는 제후들의 보호 아래 겨우 명맥을 유지하는 처지가 되었다.


18. 난왕(赧王)과 주나라의 최종 멸망

섹션 제목: “18. 난왕(赧王)과 주나라의 최종 멸망”

五十九年秦取韩阳城负黍西周恐倍秦与诸侯约从… 秦昭王怒使将军摎攻西周. 西周君饹秦顿受罪尽献其邑三十六口三万. … 周君、王赧卒周民遂东亡. 秦取九鼎宝器…

번역: 59년에 진(秦)나라가 한나라의 양성과 부서를 취하자 서주(西周)가 두려워하여 진나라를 배반하고 제후들과 합종을 약속했다… 진 소왕이 노하여 장군 규(摎)를 보내 서주를 공격했다. 서주 군주가 진나라로 달려가 머리를 조아리고 죄를 빌며 36개 읍과 3만 명의 인구를 모두 바쳤다. … 주나라 군주와 난왕이 죽자 주나라 백성들은 마침내 동쪽으로 달아났다. 진나라가 구정과 보물을 취했다…

주석: 주나라의 마지막 왕 난왕은 진나라의 압박 속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 천하의 상징이었던 구정이 진나라로 옮겨짐으로써 800년 주나라의 역사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太史公曰:学者皆称周伐纣居洛邑综其实不然. 武王营之成王使召公卜居居九鼎焉而周复都丰、镐. 至犬戎败幽王周乃东徙于洛邑. … 后稷居邰太王作周. 丹开雀录火降乌流. 三分既有八百不谋. … 檿弧兴谣龙漦作蠹. 穨带荏祸实倾周祚.

번역: 태사공이 말한다: 학자들이 모두 주나라가 주왕을 치고 낙읍에 거주했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무왕이 경영하고 성왕이 소공을 시켜 점을 쳐서 구정을 두었으나 주나라는 다시 풍(丰)과 호(镐)에 도읍했다. 견융이 유왕을 패배시킨 후에야 주나라는 낙읍으로 동쪽으로 옮겼다. … 후직이 태 땅에 살고 태왕이 주나라를 일으켰다. 붉은 책과 붉은 새의 상서가 내렸다. 천하의 3분의 2를 가졌고 800 제후가 기약 없이 모였다. … 활과 화살통의 노래가 일어나고 용의 침이 좀이 되었다. 퇴(穨)와 대(带)의 재앙이 실로 주나라의 운명을 기울게 했다.

주석: 사마천은 주나라의 도읍지에 대한 오해를 바로잡으며 결론을 맺는다. 주나라는 처음부터 낙양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서쪽의 풍·호에서 전성기를 누리다 국력이 쇠한 뒤에야 낙양으로 밀려난 것이다. 찬시(贊詩)를 통해 주나라의 신비로운 시작과 비극적인 끝을 요약하며 역사의 무상함을 노래한다.


내용원문 라인비중
1-2시조 후직과 초기 방황222-226~5%
3-4고공단보의 천도와 양보228-230~5%
5-6문왕의 덕치와 무왕의 준비234-246~15%
7-8목야 전투와 상나라 멸망248-258~15%
9-10주공 섭정과 성강지치264-268~10%
11-12목왕의 원정과 보형 제정270-274~10%
13-15여왕의 폭정과 서주의 멸망280-298~15%
16-18동주의 쇠퇴와 최종 멸망300-380~20%
19태사공왈 및 찬시382-3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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